달라진 맥락 2014년으로 본회퍼 나를 따르라 옥중서신 윤리학 읽기
+ 나를 따르라(허혁 역) 달라진 맥락
17년 전 대학원 때 처음 읽은 느낌과 오늘의 세월호 사건 맥락에서 읽는 느낌의 차이가 발생했다. 신학과 신앙의 갭을 없애버리며 삶의 맥락이 달라졌다. 본회퍼는 31살 때 ‘나를 따르라’를 저술했다. 이후 8년 간 중기와 후기 본회퍼의 신학발전에 따른 인식 차이는 없었을까? 후대에 기록한 옥중서신과 윤리학 속에서 만들어진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갖고 다시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 나찌즘 아래 도출된 하나의 상황신학.
초기저작 ‘나를 따르라’는 어떤 면으로 보면 마치 복음주의자의 문자적 성서읽기 이해처럼 여겨진다. 일부는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인 결론도출을 이끌어내려는 불편한 느낌마저 초래한다. 나만의 오해일까? 아마도 아마도 본회퍼가 처한 시대성 때문인 듯하다. 나찌즘의 도전과 국가주의화된 교회 앞에 점점 무너지고 있는 고백교회와 신앙에 대해 방어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맥락아래 저항의 삶으로 저술된 하나의 상황신학이 나를 따르라일 것이다.
- p86-88. 하나님 말씀됨에 대한 이해 차이.
카렌 암스트롱의 지적처럼 하나님 말씀됨에 대한 인식차가 본회퍼와 오늘의 나 사이에 존재한다. 기독교 공동체 역사 안에 말씀은 문자적, 도덕적, 비유적, 영성적, 신비적 해석의 다양성이 늘 존재했다. 말씀의 말씀됨은 입체적 다가옴이다. 구전과 기록된 당시의 문자적인 1차적 이해뿐만 아니라 2000년 기독교 역사와 교회공동체 안에 있었던 개인과 공동체가 이를 해석하고 적용하며 실천해왔던 그 과정 모두가 하나님 말씀으로 존재했다. 이런 의미 속에 말씀이 살아있다는 신앙이해가 가능케 된다. <나를 따르라> 란 이 책 속에 나타나는 본 회퍼의 말씀 이해는 이런 통전적인 역사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이 페이지 속 언급들은 별로 공감되지 않는다.
- p92. 96. 100 대속론적 예수 이해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대속론적 이해에 대한 재고. “예수는 세상의 죄 때문에 고난 받으셨고 모든 죄책이 넘겨졌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 대리적인 고난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고난만이 속죄의 고난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지셨으며..”대속론 교리신학의 경계선을 오르내리는 느낌이다. 로마제국과 유대종교권력의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과 참여란 역사적 예수의 1차적 십자가 사건이 중요하다. 예수 죽음 자체 또한 하나님의 1차적 뜻과 계획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문자적 대속죄론은 후기에 어떻게 변화되었나? 나찌즘의 제국주의에 저항한 본회퍼의 맥락과 예수의 대속론적 죽음이 어떤 상관성을 갖게 되는 것인가?
- 제자직과 개체. p102
왜 개인주의화된 수도원적 영성같은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질까? 나찌즘이란 시대성을 갖고 보면 일면 이해가 가지만 지나치게 개인과 사회를 분리하는 개체성 이해 아닐까? 사람은 늘 집합적 존재이지 않은가? 제자직과 개체를 말한 부분에서 예수의 중보성, 그리고 직접성을 기피하는 이해는 동의가 안 된다. 이 부분은 후기 본회퍼 사상, 성숙한 세계와 성숙한 현대 인간이 신없이 종교없는 기독교를 살아내는 견해와 틈새가 생긴 경우로 보인다.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예수 정체성을 교회공동체의 따름으로 이해한 진일보한 사상과 겹쳐 살펴볼 부분이다.
- 104p. 중보적 존재로서의 예수 이해.
역사적 예수는 직접종교를 가져왔고 살아냈다! 성전종교권력이란 중보종교에 저항하며 허물었고 매개체나 브로크없는 직접종교를 체현했지 않은가! 중보적 예수를 말하는 것은 또 다시 예수가 체현하는 것을 다시 허물고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다. 예수 대속론과 중보적 존재로서의 예수 이해는 예수 신화화이다. 역사적 예수가 나를 따르라고 가르치시며 살아내신 생애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따라가야 할 책임감, 참여, 저항의 삶을 밀어내고 자칫 교리화, 화석화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 산상수훈 설교가운데 마태복음 5장38절 ‘보복’개념 이해.
p158. 보복에 대한 주석적 이해에 대한 다른 견해. 필로와 당시 문헌을 살펴보며 전쟁개념의 어원을 토대로 월터 윙크는 안티스테나이를 비폭력적인 적극적인 저항으로 해석했다. 악을 악한 방법으로 대적하지 말라는 뜻이지 수동적인 침묵에 머물라는 해석도 아니다. 오른쪽 뺨에 이은 왼 뺨 들여대기, 짊 들고 길 더 가주기, 겉옷요구에 속옷주기도 같은 맥락의 해석 예들이다.
-162p. 지배체제란 성서주석 이해 결핍.
성서의 지배체제 사상에 대한 주석적인 이해도 충분히 연구되지 못했다. 만일 훗날 폭력을 정당화하는 평화주의 논쟁에서 인용된 본회퍼(미친 운전수 끌어내리는 비유)사상의 남용을 인식했더라면 이런 주장은 철회되었을 것이란 월터 윙크의 언급을 참조하며 읽어내야할 부분이다.
- 그리스도의 모습(형상)에 대한 이해 차이 p292~298
신화적 해석과 신앙이해에 대해.. 아담과 예수 이해에 대한 대조적인 접근 부분에 대해..특히 아담 이야기를 역사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실존적인 해석을 피한 채..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의 모습 부분은 동의가 잘되지 않는다.)
문자적, 역사적 사건으로만 타락을 이해하면 아담과 예수와의 대비를 말할 수 있지만 만일 타락 사건을 은유와 실존론적 해석으로 들여다보게 되면 이런 논리는 논란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타락은 인간과 사회 안에 만연된 악의 실재에 대해 각 시대가 당대의 사조를 갖고 해석하고 있는 유한성을 띤 개념이 아닌가? 타락 사건의 역사적 시점없이 원래부터 인간이 이런 모습을 지니고 살며 존재했다면 그리스도의 형상부분이 어떻게 전개될까? 사실상 예수 이전과 이후 역사적인 인간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서해석과 신학적 인식이 달라졌을 뿐 사람의 본질은 크게 달라져 보이지 않는다. 예수 사건이 발생했고 성령이 내주한다고 신앙을 고백해왔지만 구약시대와 신약성서 이후 사실상 인간의 본질 가운데 어떤 부분이 달라진 것인지 잘 모르겠다. 오늘의 세월호 사건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개인과 사회구조의 인간의 일탈과 일그러진 인간상을 보면 어떻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손쉽게 말할 수 있을까? 현실과 신학이해의 골이 너무 깊고 넓은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갖고 숙고해야 될 부분이다.
++ 옥중서간과 본회퍼의 세속화와 비종교적 해석에 대해
- 오늘의 본회퍼가 있다면?
만일 본회퍼가 21세기 오늘의 상황에서 신학을 전개했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자신의 신학을 만일 완성했더라면 성숙한 혹은 성인된 세계와 종교없는(비종교적) 기독교 신앙이해는 어떨까 귀결되었을까? 이 부분은 마치 틸리히의 미완성 신학과도 겹쳐있는 것 같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와의 만남 이후 후기 폴 틸리히가 비교종교학적 입장에서 조직신학을 다시 재구축하려는 생각으로 초고를 남긴 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좀 더 심층적 다채로운 다종교사회문화 아래 놓인 오늘의 현대인들이 도전해야할 영역이 아닐까싶다.
- 후기 서신 옥중서신 으로 과거 들여다보기.
p283-284. 후대저술인 ‘윤리학’과 ‘옥중서신’에서 본회퍼가 표방한 ‘성인된 세계 혹은 성숙한 세계’, 성서의 세속적 이해에 대해. “신을 상실했고 신없는 세계 가운데(신없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거기에 따르는 하나의 인간으로 사는 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 성인된 세계와 성인된 인간, 종교없는 기독교와 세속적 삶에 대해
인간의 자율성 운동이 어느 정도 완성에 도달해 죽음, 죄, 고난, 허무, 불안 같은 문제를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해결해나가고 있다. 인간 의식과 능력의 한계상황과 직면하며 현대인은 제멋대로 신에게 기대지 않는다. 현대인은 성인된 세계를 사는 성인된 인간이다. 종교없는 시대에 신없이 사는 인간이다. 기독교는 늘 종교의 어떤(하나의) 형식이며 역사적으로 잠정적인 한 인간의 표현형식이었다. 종교의 시대는 지났고 종교없는 시대를 맞고 있다. 기독교는 종교의 대상이 아닌 성인된 세계의 주인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성인된 인간의 주인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성서 복음에서 종교적인 의상을 제거하는 세속적 이해가 나왔다. 그러나 본회퍼의 비종교(종교 아닌, 없는) 신앙사상 역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책임성 강조와 맞닿아 있다.
본회퍼에게 세속적으로 사는 삶은 신을 상실해 신없는 세계의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부름을 듣고 따르는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었다. 성인된 세계에서 종교는 종교적 형식에 인간을 몰아넣는 것보단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순종하는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성인된 세계에서는 반드시 신없이 살아야 한다. 신없는 세계를 종교적으로 가리거나 신성화해서는 안 된다. 세속적으로 살아야 하고 거기에서 신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다. 잘못된 종교적 속박과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기독교인됨은 일정한 양식으로 죄인이나 회개, 성도라는 어떤 방법론이나 종교적인 근거위에서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인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들 사이에서 어떤 인간유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만든다. 종교적 행위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생활 가운데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기독교인을 만든다. 본회퍼에게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곧 신앙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종교적 관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이다. 종교적 형식을 취하는 종교는 세상으로부터 유리된 종교세계에 속하게 만든다. 그것은 종교생활이지 그리스도를 본받는 신앙생활이 아니다. 본회퍼에게 신앙은 전체적인 삶이었고 그리스도의 부르심 또한 전체적인 삶 앞에 직면해 서는 것이었다.
- 옥중서신 p283~ 교회의 고백 부분.
“교회는 고백한다.- 교회는 죄없는 사람들의 피가 하늘을 향해서 울부짖는 것을 보고 외쳐야 할 때 침묵을 지켰다. 교회는 바른 말을 바른 방법으로 바른 때 찾아내지 못했다”교회는 고백한다.- 권력 앞에 무릎 꿇고 가난한 자를 약탈하고 방조하는 일에 교회가 침묵했다.” 왜 이런 고백은 교회공동체에 늘 현재진행형 고백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2014년 5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예수를 구현하는 교회.
문자적 예수 유일성 신앙이해에서 진일보한 것일까? 옥중생활 가운데 역설적인 평안을 찾았던 것인가. 당시 나찌가 조장한 전체주의의 폭력이란 맥락아래 뮐러의 국가교회에 대항해 홀로서기의 필요성과 예수 유일성과 따름의 외침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죽음의 고난을 향한 옥중에서의 새로운 삶의 자리는 이마저도 초월하게 하지 않았을까?
+++ 제기되는 몇가지 물음
- 2차세계대전의 종말 시점에 독일국가 교회의 배신아래 고백교회의 저항과 참여란 맥락과 오늘의 맥락은 무엇이 얼마만큼 다를까?
- 본회퍼에게 부활예수는 역사적인 사실언어의 영역인가? 아니면 종교경험에 기반했던 경험언어의 특색을 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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